틀을 깬 바둑
2022년 여름, 대안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캐나다 밴쿠버로 비전캠프를 다녀왔습니다. 밴쿠버 시립미술관에서 이 열렸었는데, 한편에 이세돌 바둑기사가 구글의 딥마인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를 이겼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인솔자인 나와 함께 갔던 학생들 모두 이세돌의 사진이 반가웠습니다. 또 한편 인공지능 역사에서 이세돌이 알파고를 이긴 사실이 큰 의미를 갖는다는 것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2016년 3월 대한민국 서울 종로구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인간 프로 바둑기사와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의 세기의 바둑대결이 열렸습니다. 이날 알파고는 인간을 4승 1패로 이겼고, 이후 최종 74전 73승 1패를 기록하고 은퇴했습니다. 당시 세계 바둑 랭킹 1위였던 중국의 커제 9단마저 3연승으로 꺾은 알파고에게 유일한 1패를 안긴 인간 바둑 기사가 바로 대한민국의 이세돌 9단입니다. 뉴스와 미디어는 온통 알파고 AI 바둑 프로그램을 조명했지만 나는 여기서 유일한 인간 1승 이세돌의 꿈과 비전을 조명해 보겠습니다.
이세돌은 다섯 살에 아버지에게서 바둑을 처음 배웠습니다. 초등학생 때 프로바둑기사 입단을 통과했고, 그때부터 28세까지 세계 바둑대회에서 13회나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1989년 조훈현 9단이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는 장면을 TV로 보면서 프로바둑기사가 되겠다는 꿈을 처음으로 꾸었습니다. 이세돌은 나이는 어렸지만 자신만의 꿈을 갖게 되면서부터 학교수업을 스스로 정리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둑에 몰입한 이세돌은 열두 살에 프로기사에 입단하여, 조훈현 9단, 이창호 9단에 이어 역대 세 번째 최연소 프로바둑기사 입단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바둑에 전념하기 위해 중학교 3학년때 학교를 자퇴한 이세돌은 18세에 32연승이라는 연간 최다승 기록을 세우고 2006년 최우수 기사에 선정되었습니다. 이세돌의 아버지의 꿈은, 자신의 아들이 조훈현 9단이나 이창호 9단 같은 최고의 바둑고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꿈을 이세돌이 이룬 것이다.
이세돌의 바둑 스타일은 창의적이고 틀이 없는 자유로움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바둑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각은 틀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틀을 배운 바도 없고요.”
알파고와의 대국 후에, 몇몇 미디어는 틀을 갖지 않는 그의 자유로운 바둑 스타일이 알파고를 이긴 이유일지 모른다고 분석했습니다. 짜여진 틀 안에서 데이터에 의존하는 인공지능 알고리즘 방식이,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튀어 버린 제4국의 이세돌의 78번째 수에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둑의 전설, 조훈현
사실 ‘바둑’하면 나에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대한민국 바둑의 전설이자 유일하게 국수로 불리는 조훈현 9단입니다. 나는 바둑은 못 두지만 그의 생각이 궁금해 그가 쓴 책은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1989년 한중일 최정상의 바둑기사들이 참가한 '바둑 올림픽'으로 불리는 잉창치배에서, 세계 최정상의 기사들을 모두 꺾고 첫 우승을 차지하며 ‘바둑황제’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의 잉창치배 결승대국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만화와 TV드라마가 바로 그 유명한 '미생'입니다. 조훈현은 세계 최다승과 세계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가 쓴 책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바둑 하나밖에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오로지 바둑이다. 예전에는 이기기 위해서 바둑을 두었는데, 이제는 이기고 지는 것과 상관없이 그저 바둑을 둘 수 있다는 게 좋아서 둔다. 타고난 승부사로 불리던 나였지만, 멀찍이 떨어져서 보니 인생에서 승패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중요한 것은 결과가 어떠하든 최선을 다하면서 내 갈 길을 가는 것이다.” 조훈현의 이 말은 내 가슴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1등을 하려고 공부를 하면 옆 친구를 친구로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친구가 이겨야 할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이 친구를 이겨야 내가 1등을 하니까요. 하지만 좋아서 공부를 하면 친구가 그냥 친구입니다. 내가 배운 것을 나눠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희한하게 1등이 부차적으로 옵니다. 1등 했다고 자랑하지도 않지만 설령 1등이 아니어도 불행하지 않습니다.
'왜'라는 질문
이세돌은 “질문하지 않고 궁금해하지 않으면 가르쳐주는 사람의 틀에 갇히게 된다.”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은 어쩌면 조훈현으로부터 배워 자신의 것으로 확장시킨 것인지도 모릅니다. 조훈현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답을 찾는 훈련을 통해 바둑을 두었습니다. 그래야 창의적인 새로운 수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왜 이런 거지?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이게 정말 최선일까?’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졌습니다.
‘왜?’라는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이야 말로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절대로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정형화된 공식바둑을 두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민해서 공격적으로 바둑을 두었기 때문에 상대방이 조훈현 9단을 쉽게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훈현 9단의 별명은 ‘화염방사기’입니다.
생각을 중요시하는 조훈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식을 외워서 문제를 푸는 건 매우 쉽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조금이라도 공식에서 벗어난 문제가 나오면 힘을 쓰지 못한다. 반대로 혼자서 실컷 헤매 본 사람은 공식 따위는 몰라도 된다. 생각을 하면서 자신만의 해법을 찾아내면 되기 때문이다. 생각의 자유를 주면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들은 개성이 강해지고 자아가 단단해진다. 인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끌어갈 자시감과 확실한 인성이 형성될 수 있다”
우리나라 교육이 나아갈 방향이 바로 조훈현 9단이 말한 방향이 아닐까요? 공식을 외워서 수학을 푸는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그 수학문제가 왜 그런지 설명하라는 것입니다. ‘왜?’가 없는 교육은 처음 맞닥뜨리는 새로운 문제에 대해 해결할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꿈대로 사는 사람들 시리즈)
by 루아흐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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